8월의 크리스마스 말하지 못한 사랑이 남긴 것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마지막 생을 앞둔 한 남자의 마지막 여름을 담담하게 그린 영화다.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 감정의 결을 풀어본다.
말이 없어도 전해지는 것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말하면 "이게 무슨 영화지?" 싶었다. 극적인 반전도 없고, 눈물을 쥐어짜는 장면도 없다. 그냥 어느 작은 사진관, 더운 여름, 그리고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게 됐다. 뭔가가 가슴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한석규가 연기하는 정원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자다. 그런데 영화 내내 그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도 모르고, 그를 찾아오는 주차 단속원 다림(심은하)도 모른다. 정원은 알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사진관을 지키고, 동네 사람들 사진을 찍어주고, 아버지 밥상을 차린다. 이 '평범함'이 오히려 더 울컥하게 만든다. 다림이 사진을 맡기러 오면서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싹트기 시작하는데, 이게 연애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감정이다. 커피 한 잔, 짧은 대화, 수줍은 눈빛. 그게 전부인데 그 안에 담긴 온도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다. 정원은 다림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내밀지 않는다. 자신이 곧 떠날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게 그가 다림을 아끼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진호 감독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을 화면에 가득 채운다. 눈빛, 손짓, 침묵.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이 전달된다는 걸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제대로 느꼈다. 연기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배우 덕분에 화면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말하는 이별의 온도
제목이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니. 크리스마스는 보통 12월, 눈이 오는 계절, 설레는 날의 이미지인데 왜 하필 8월일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그 의미가 천천히 다가왔다. 8월은 가장 뜨거운 계절이다. 생명력이 넘치고, 아직 무언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다. 그런데 정원에게 그 8월은 동시에 마지막 계절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갖는 '선물'과 '기념'의 뉘앙스를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제목은 정원이 다림에게, 혹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선물 같은 느낌이 있다. 떠나는 사람이 남기는 것들, 그 따뜻한 흔적. 정원이 자신의 영정사진을 직접 찍어두는 장면은 처음에는 너무 덤덤해서 오히려 더 낯설었다. 슬프게 찍지도 않고 그냥 담담하게 셔터를 누른다. 이 장면이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것 같다. 죽음을 앞두고도 호들갑 떨지 않는 사람, 조용히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사람. 그 태도가 어쩌면 가장 깊은 슬픔의 표현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다른 멜로영화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과장하지 않는다.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이 사람의 하루를 보여줄 뿐인데 보는 사람이 스스로 감정을 채워 넣게 된다. 그 방식이 훨씬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별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온화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게 1998년에 나온 영화라는 걸 생각하면 더 놀랍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요즘 영화들보다 더 여운이 깊다.
지금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요즘 콘텐츠는 빠르다. 숏폼 영상에 익숙해진 탓인지 2시간짜리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보는 게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느린 속도가 오히려 강점이다. 억지로 집중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석규와 심은하의 연기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특히 한석규는 이 영화에서 말수가 극단적으로 적은데, 표정과 시선만으로 감정의 흐름을 다 보여준다. 연기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은 봐야 할 장면들이 많다고 생각할 정도다. 영화를 보고 나서 주변의 평범한 일상이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생각. 정원의 이야기가 불러오는 감각이다. 이런 영화가 남기는 질문들이 나는 좋다. 강추하는 영화다. 특히 조용한 저녁에 혼자, 혹은 오래된 사람과 함께 보기 좋은 영화다. 다 보고 나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감정이 생긴다면, 그게 이 영화가 의도한 것일 거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 한켠이 조용히 따뜻해진다. 언젠가 나의 평범한 하루도 누군가에게는 선물 같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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