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토익 600점과 폐수 사이에서
토익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 제목에서부터 뭔가가 걸린다. 600점. 지금 기준으로도 높은 점수는 아니지만, 1995년에 고졸 말단 사원이 회사 새벽 토익반에 나가가며 그 점수를 준비한다는 건 단순한 시험 공부가 아니었다. 8년째 커피 타기와 잔심부름으로 하루를 채우다가, 처음으로 진짜 업무를 할 수 있는 자리에 닿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 맥락을 알고 나서 영화를 보면 토익 점수 하나가 얼마나 무거운 의미를 갖는지 느껴진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1995년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 시대가 캐릭터를 만든다
이 영화의 배경인 1995년은 한국 사회에서 꽤 독특한 시기였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기조 아래 영어 능력이 직장인의 핵심 스펙으로 부상하던 시기였고, 거리마다 컴퓨터 학원과 영어 학원이 넘쳐나던 때였다. 대기업들이 고졸 사원을 대상으로 토익반을 개설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흐름이었다. 영화의 각본을 쓴 홍수영 작가는 실제로 1990년대 대기업 토익반 강사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 됐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덕분에 영화는 단순한 직장 코미디 이상의 맥락을 갖는다. 세 주인공 자영, 유나, 보람은 입사 8년차임에도 불구하고 학력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졸 신입 직원의 커피를 타고 심부름을 다닌다. 실무 능력은 이미 검증됐는데 직급은 여전히 말단이다. 이 설정이 1990년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금도 비슷한 구조가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는 걸 보는 내내 느꼈다. 스펙이나 자격증, 학벌이라는 기준이 실력보다 앞서는 상황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속 복식과 소품, 사무실 배경이 1990년대를 정교하게 재현했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낡은 컴퓨터, 팩스, 두꺼운 서류 더미, 형광등 아래 빼곡히 앉은 사무직 직원들의 풍경이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한 세대에게는 강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역사적 배경으로 작동한다. 어느 쪽 관객에게도 유효한 배경이었다는 점에서 시대 설정이 영리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재 중 하나가 실제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991년 두산전자 구미 공장에서 페놀이 낙동강에 유출돼 수돗물이 오염됐고, 수백만 명이 피해를 입은 대형 환경 사고였다. 영화는 이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폐수 유출이라는 소재를 가져왔다. 그 무거운 소재를 코지 미스터리와 케이퍼 장르로 풀어낸 것이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선택이었다. 사회 고발 영화인데 전혀 무겁지 않고, 코미디인데 하고 싶은 말은 다 한다는 그 균형이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1995년이라는 시대가 지금과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장면들도 곳곳에 있다. 회의실에서 여직원이 발언하면 무시당하고, 아이디어를 내도 남성 상사의 이름으로 올라가는 장면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명백히 잘못된 상황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고발의 어조보다는 그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방향으로 그려낸다. 분노보다 응원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세 캐릭터가 함께여야 했던 이유 고아성·이솜·박혜수의 조합이 만든 것
이 영화가 단독 주인공 서사가 아니라 세 명의 동등한 주인공 구조를 택한 건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각본의 초고는 이자영이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회 고발물에 가까웠는데, 이종필 감독이 이를 세 사람의 연대 서사로 재구성했다. 그 선택이 영화의 결을 완전히 바꿔놨다고 생각한다.
자영(고아성)은 오지랖이 넓고 정의감이 강하지만 상황 판단이 앞서기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캐릭터다. 유나(이솜)는 뼈 때리는 직구 멘트를 가진 현실주의자인데, 사실 셋 중에 가장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한다. 보람(박혜수)은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 경력이 있는 수재인데 현실에서는 가짜 영수증 메꾸기 달인으로 살고 있다. 이 세 명의 성격이 겹치지 않고 서로의 빈틈을 정확히 채운다. 혼자였다면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쳤을 이야기가 셋이 모이면서 균형을 잡는 방식이 영화 내내 작동한다.
고아성은 인터뷰에서 이 역할을 준비하면서 1990년대 직장 여성의 실제 경험담을 많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 리서치가 연기에 녹아들었는지, 자영이 부당한 상황 앞에서 분노하는 방식이 과장되지 않고 실제처럼 느껴졌다. 거창한 연설이나 결의보다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에서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한 마디가 이 캐릭터의 전부를 설명했다.
이솜이 연기한 유나는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는 캐릭터였다. 겉으로는 냉소적인데 정작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리를 지킨다. 현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결국 포기하지 않는 구조, 그게 유나라는 캐릭터가 가진 힘이었다. 박혜수의 보람은 수학적 머리로 복잡한 서류와 숫자를 꿰뚫는 장면에서 가장 빛났다. 셋의 케미가 영화 내내 자연스러웠는데, 촬영 전 배우들이 충분히 시간을 보내며 호흡을 맞췄다는 게 화면에 그대로 드러났다.
세 배우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해 김현철의 '왜 그래'를 함께 부른 영상이 유튜브에서 400만 뷰를 넘긴 것도 이 케미가 스크린 밖에서도 통했다는 증거였다. 영화 홍보 콘텐츠가 영화 자체만큼 화제가 됐다는 건 그만큼 세 배우의 조합이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전달됐다는 뜻이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지금 다시 봐도 유효한 이유 꼴찌들의 서사가 가진 힘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회사에서 내가 맡은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잘 모르겠는 시기였는데, 자영이 폐수를 목격하고 혼자 고민하다가 결국 움직이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 뭔가가 걸렸다. 부당한 걸 알면서도 나서지 않는 게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그냥 움직이기로 하는 것. 그게 대단한 용기라기보다는 더 이상 모른 척하기 싫다는 감각에서 나온다는 게 설득력 있었다.
이 영화가 사회 고발 영화임에도 무겁지 않은 이유는 감독이 처음부터 그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이종필 감독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너무 무겁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직접 밝혔다. 그 의도대로 영화는 분노를 자극하기보다는 세 사람이 문제를 파헤치고 증거를 모으는 과정을 마치 작은 수사극처럼 경쾌하게 그린다. 보는 사람이 응원하게 만드는 서사, 그게 이 영화의 장르적 선택이었다.
제작자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제안할 때 "고졸 사원들이 파이팅하는 이야기"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위인전에 나오지 않고,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하지만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기획 의도가 영화 전체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영웅적인 고발자가 아니라 그냥 더 이상 못 참겠다고 결심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이 영화를 더 가깝게 느끼게 만든다.
누적 관객 157만 명, 관람객 평점 9점을 넘기며 2020년 한국 영화 중 손꼽히는 흥행작이 됐다. 코로나19로 극장이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꾸준히 입소문을 탄 영화였다. 지금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는데, OTT에서 다시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회자되는 걸 보면 한 번 보고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1995년 이야기인데 보면서 지금이 떠오른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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