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그 말 한마디를 위해 배운 영어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 2017)는 김현석 감독, 나문희·이제훈 주연의 한국 드라마 영화로, 8천 건의 민원을 넣은 동네 민원왕 할머니와 원칙주의 9급 공무원의 예상 밖 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들의 미국 의회 증언을 모티브로 했으며, 누적 관객 328만을 돌파했고 나문희는 이 작품으로 데뷔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의 제목 '아이 캔 스피크'는 영화 내내 단 한 번만 등장한다. 청문회장에서 의장이 "증언할 수 있느냐"고 묻는 순간, 옥분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 한 마디. 영화 전체에서 그 문장을 교묘하게 피해가다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딱 한 번 터뜨리는 연출이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들었다. 동네 민원왕 할머니 이야기인 줄 알았다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그 전환,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아이 캔 스피크가 코미디로 시작한 이유 무거운 주제를 건네는 방식에 대하여
이 영화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7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됐다. 당시 심사위원들이 남긴 평이 이 영화의 기획 의도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민원왕인 할머니를 통해 분노와 슬픔을 전제로 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발랄하게 비틀어냈다"는 것. 무겁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는 대신, 코미디로 시작해서 서서히 진실에 다가가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게 이 기획이 선택된 가장 큰 이유였다.
전반부의 옥분과 민재는 철저하게 코미디다. 8천 건의 민원을 넣은 동네 골칫거리 할머니와 원칙대로만 일 처리하는 신입 공무원의 티격태격. 그 유머가 억지스럽지 않고 실제로 웃기다. 나문희가 연기한 옥분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 습관과 이웃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 일상의 디테일들이 전반부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그 코미디가 쌓여야 후반부의 전환이 제대로 작동한다. 옥분이 왜 영어를 배우고 싶어 했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 앞에서 봤던 모든 장면들이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민원을 수천 건씩 넣었던 이유, 영어에 집착했던 이유, 이웃들과 부딪히면서도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 그 이유들이 한꺼번에 연결되는 장면에서 관객이 무너지는 건 전반부가 충분히 그 인물을 친숙하게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여러 편 있었는데, 이 영화가 유독 관객 평점 9점대를 유지하며 오래 회자된 이유가 여기 있다. 피해의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방식. 분노와 슬픔을 강요하는 대신, 그 사람의 일상을 먼저 알게 한 뒤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구조. 그 접근 방식이 달랐고,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냥 나문희 할머니가 영어 배우는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다. 주변에서 "보러 갈 때 휴지 챙겨 가라"는 말을 들었는데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예상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그 경험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다.
나문희가 이 역할이어야 했던 이유 데뷔 첫 여우주연상이 말해주는 것
나문희는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데뷔 첫 여우주연상이었다. 나문희가 언제 데뷔했는지 찾아보면 1960년대부터 활동한 배우라는 걸 알 수 있다. 수십 년 경력의 배우가 이 작품으로 처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이 역할이 얼마나 특별한 연기를 요구했는지를 보여준다.
옥분이라는 캐릭터는 겉으로는 우스운 사람이지만 안으로는 오십 년 넘게 말 못 할 비밀을 안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 두 층위를 동시에 유지하면서 어느 한쪽도 과장하지 않는 것, 그게 이 역할의 핵심이었다. 코미디 파트에서 너무 가볍게 치우치면 후반부의 감정선이 공허해지고, 처음부터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면 서사 전체의 설계가 무너진다. 나문희는 그 균형을 정확하게 잡았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민재가 옥분의 비밀을 알고 수선집에 아무 말 없이 찾아온 순간, 옥분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밥은 먹었어?"라고 묻는 장면. 그 한 마디 안에 억울함과 안도감과 자존심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 오래 혼자 감당해온 사람의 방어 방식이 그런 거라는 걸, 대사 한 줄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나문희의 연기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된다.
나문희 본인도 인터뷰에서 "평소 위안부 피해자 분들께 관심이 많이 있었다. 옥분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에 자긍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 마음이 연기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단순히 잘 만든 캐릭터가 아니라, 그 인물에게 진심으로 임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연기가 있다. 옥분이 그런 경우였다.
이제훈이 연기한 민재도 단순한 조력자로 그려지지 않았다. 원칙주의자가 점점 옥분이라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쌓였고, 청문회 장면에서 난입하는 그 행동이 억지스럽지 않았던 건 그 과정이 충분히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두 배우의 조합이 이 영화를 단순한 감동 영화가 아니라 관계 영화로 만들었다.
실제 의회에서 촬영된 증언 장면 아이 캔 스피크가 역사와 맞닿은 방식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미국 의회 증언 장면은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실제 의회에서 촬영됐다. 세트가 아니라 실제 공간을 쓴 것이다. 그 선택이 장면에 다른 무게를 부여했다. 실제 역사가 일어났던 공간, 혹은 그와 유사한 공간에서 나문희가 영어로 증언하는 장면은 스크린 밖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느낌을 줬다.
이 영화가 모티브로 삼은 실제 사건은 2007년 미국 하원 위안부 사죄 결의안 채택 청문회다. 당시 이용수 할머니, 김군자 할머니, 그리고 네덜란드 출신 위안부 피해자 얀 루프 오헤른이 영어로 직접 증언했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할머니들이 세계에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영어로 증언했다는 사실, 그 이유를 영화는 옥분이라는 인물을 통해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보여줬다.
영화 속 옥분이 영어를 배우고 싶었던 첫 번째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동생과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이자 진짜 이유는 세계에 직접 자신의 말로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번역을 거치지 않고, 통역사의 말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 영어 공부라는 소재가 전혀 다른 의미가 됐다.
영화를 보고 나서 실제 2007년 청문회 영상을 찾아봤다. 이용수 할머니가 실제로 영어로 증언하는 장면이 남아 있었다. 영화와 현실이 겹쳐 보이는 그 경험이 꽤 오래 남았다. 누적 관객 328만 명이라는 수치는 단순한 흥행 수치가 아니라, 이 영화가 전달한 것을 받아들인 사람의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 작가 100인이 뽑은 올해의 영화 1위로 선정된 것도 그 맥락이었다. 아이 캔 스피크는 말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용기인지를, 가장 조용하고 정확한 방식으로 보여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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